아름다움이 선사하는 휴식
프리데릭 레이턴, 타오르는 6월(Flaming June), 1895년, 캔버스에 유채, 120.6x120.6, Museum of Art of Ponce
글 - 김언정 (고양문화재단 큐레이터)
보는 순간 아름다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부드러운 금빛 피부를 덮고 있는 주황빛의 얇은 쉬폰드레스를 입고 편한대로
웅크린 채 잠든 여인에게로 우리들의 마음이 흐른다. 정사각형의 화면을 가득 채운 그녀는 긴 머리카락에 감싸여 곤히
잠들어 있다. 머리 위로는 햇빛에 반짝이는 지중해가 우리의 시선을 열린 공간으로 시원하게 이끌어 준다. 원을 그리 듯
수직으로 누운 인물과 조화를 이룬, 수평의 난간과 해수면 그리고 상부의 구조물은 편안한 잠을 깨트리지 않기 위한 안
정감을 선사한다.
고전적인 건축물에 걸쳐진 이국적인 꽃들과 드넓은 바다는 신화 속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여인은 시간을 초월한 어느
곳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고 잠들어 있다. 이 그림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이러한 이상향의 정서와 휴식 같은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영국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프레데릭 레이턴(Lord Frederick Leighton, 1830-1896)이
그린것이다. 그는 ‘타오르는 6월’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피렌체 메디치가의 묘비조각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밤’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여러 차례 드로잉을 거친 후에 작업에 들어갔다. 또한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도로시 딘(Dorothy Dene, 1859-1899)은 레이턴이 그림의 모델을 찾기 위해 6개월이나 노력을 기울인
후에 만났던 여인이다. 보랏빛 눈과 숱 많은 붉은 금발의 딘은 그가 완성하고자 한 아름다움을 위한 존재였다. 딘 보다
28살이나 많았던 레이턴은 아버지처럼 그녀를 평생 후원했고 죽어서는 거액의 유산을 남길 만큼 깊이 아꼈다.
프리데릭 레이턴은 40대 후반에 로열아카데미의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지명도가 높았다. 또한 빅토리아여왕의 총애를
받아 영국역사상 처음으로 남작작위를 받았을 만큼 당대 영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화가였다. 특히 그는 신화와 종교
적인 주제의 그림으로 유명했으나 아름다운 인물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무엇보다 그의 화풍은 이상화된 아카데미 미술
에 저항하며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 자연에서 겸허하게 배우고자 했던 라파엘전파의 회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바로
태양빛 아래 밝고 맑은 색채의 환상적인 빛깔을 표현해 냄으로써, 화면 속에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현재에
도 여전히 그의 눈부신 미감과 오묘하게 가려진 성적인 달콤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 이상의 공감을 불러낸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술사에서는 프리데릭 레이턴이란 이름을 그리 쉽게 만날 수 없다. 그리고 20세기초엽부터 한동안
그와 그의 그림은 사람들의 홀대를 받기까지 했다. 지금도 예술계는 여전히 그를 빈번하게 불러내지는 않는다. 왜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미술계의 유행이 바뀌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수의 예술가들은 의도적으로 미
적 아름다움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물론 새로운 방식으로 미를 실현코자하는 움직이도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그 비중
이 주된 흐름에 비해 낮았다. 현대의 미술은 미적 감상의 즐거움보다 이해와 통찰을 주고자 한다. 아름다움은 예술작품
의 부가적인 목적이 되었다. 20세기 이후 주도적인 미술은 아름다움이 육체적인 휴식과 같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고 보았다.
정말 그러한가. 진정한 미는 우리가 예술작품에 이래저래 덧붙인 어떠한 평가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래서 이처럼 보는
것만으로 내면을 온통 점령하는 그림에 한참동안 마음이 머무르는 경험은 즐겁기만 하다. 소통을 위한 수고로움이 필
요 없는 저 잠든 여인처럼 편안한 그림은 아름다운 휴식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