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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곁에 다가온 가장 인간적인 거장 첼리스트 정명화 2011.05.03 | 10498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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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전시

 
 
 
정명화 Photo by 박성희
우리 곁에 다가온 가장 인간적인 거장 첼리스트 정명화
 
경지에 이른 예술가에게서 우리는 자연을 본다.
아등바등 자신을 내세울 필요도, 애써 숨길 필요도 없이 스스로를 드러내기만 해도 감동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언제나 태연자약한 자연의 모습과도 같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첼리스트 정명화에게서 자연을 본다. 그는 최상의 음악 환경 속에서 유복함을 누렸지만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하지만 자신의 숙명처럼 겸허하게 섭렵했다.
비옥한 토양에서 모든 자양분을 섭취하고 탐스럽게 영근 과실과도 같다고나 할까.
연륜의 그에게서 고상하다는 가식이 아닌, 자연스러운 품위가 느껴지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이지 싶다. 그저 순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래야만 밝은 음악을 밝게, 슬픈 음악을 슬프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아는 듯했다. 정명화의 하이든은 참 밝고 깨끗할 것 같다.

글_ 이웅규(월간 'String & Bow' 수석기자)
사진_ 박성희(Face Studio)
 
숙명과도 같은 첼로와의 만남
 
12/8/2011
어쩌면 모든 것을 순화시키는 듯한 그의 겸허한 어법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겠지만 정명화와 인터뷰를 하며 느꼈던 것은, 그의 음악 인생이 참으로 순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조로움이란 타성에 의한 것이 아닌,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서 아주 적절하고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는 의미에서이다.
예컨대, 정명화가 첼로를 선택한 것만 해도 그렇다. 그가 첼로를 하게 된 것은 클래식 뮤지션으로는 아주 때늦은 중학교 시절부터이다. 그가 피아노를 먼저 시작했기 때문인데, 이후 성악과 플루트를 하기도 했고 잠시나마 바이올린도 공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연히 어머니가 선물한 첼로는 그에게 숙명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늦은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는 결국 첼로를 선택했고, 첼로와 평생을 함께 했다. 그 전에 배웠던 피아노와 성악을 음악적 자양분으로 흡수했다. 이후 그는 국내 콩쿠르들을 휩쓸고 불과 13세의 나이에 서울시립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데뷔 무대를 갖는다. 이후 정명화는 기회의 땅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당시 최고의 거장이었던 레너드 로즈와 이고르 피아티고르스키를 만난다.
"그때 줄리어드는 세계 최고 기량의 뮤지션들이 집합했던 꿈의 필드였어요. 당시 아이작 스턴과의 트리오 결성으로 유명했던 로즈 선생님을 자주 뵐 수는 없었지만, 그의 수준 높은 제자들과 함께 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죠.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선생님은 남가주 주립대에 계셨던 피아티고르스키 선생님이었어요. 음악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도량이 큰 분이셨고, 자연스러운 그 분의 음악 성향은 저와 잘 맞았습니다. 이후에는 안탈 도라티,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루돌프 켐페,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과 같은 거장 지휘자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죠. 음악이라는 것이 소리로 만드는 예술인 만큼, 좋은 소리를 아주 다양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저에게 아주 큰 바탕이 되었어요."
잘 알려졌다시피 정명화는 세계에서 그 유래가 없는 최고의 음악가족의 일원이다.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그리고 지휘자 정명훈의 언니이자 누나이다. 또한 정명화의 언니 정명소는 플루트를 했고 오빠 정명근은 비올라를 했다. 이들은 일찍부터 가족음악회를 통해 음악적 교류를 해왔다. 음악교육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정명화는 가히 최고의 축복받은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정경화·정명훈과 함께 한 정트리오의 성공은 어쩌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터. 하지만 이들의 결성은 아주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세 사람은 이미 아주 바쁜 음악적 스케줄을 소화했을 정도로 세계적 솔리스트로서의 커리어가 한창 무르익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1969년 당시 경화와 소속되어 있던 콜롬비아 매니지먼트사에서 저희 셋을 불러 트리오 연주를 해보라고 권유를 했고, 이를 계기로 정트리오가 결성된 것이었어요. 저와 나이 차가 많은 명훈은 불과 16세였지만 저희 셋 모두 솔로 커리어로, 온전히 트리오 활동에만 전념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1년에 한 번 2주의 투어 연주를 갖는 것으로 합의를 봤었죠. 그런데도 주위에서 너무 많은 권유가 있어 한동안 트리오 활동을 접었다가 1973년 유럽에서 다시 트리오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일 년에 한 달을 투자했었죠. 저희에게 트리오 활동은 가족 모임, 그리고 즐거운 연주여행의 일환이었어요. 비록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동등한 뮤지션의 입장에서 서로를 위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2009년 정명화는 세계무대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친 바 있다. 1969년 당시 세계적 매니지먼트사였던 콜럼비아와 계약하며 이루어진 그녀의 세계 데뷔 콘서트는, 주빈 메타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였다. 솔로 커리어의 한 획을 긋는 이 무대는 분명 그의 음악인생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또한 1971년 제네바 콩쿠르 우승의 기억도 그에겐 중요한 순간이다. 주빈 메타와의 협연 무대가 미국 무대에서의 데뷔였다면, 제네바 콩쿠르 우승은 뚫기 힘들다는 유럽 무대에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저에게 1969년은 뜻 깊은 해였어요. 학생 신분을 벗고 최고의 매니지먼트사와 계약하여 연주했다는 자부심이 컸죠. 당시 콘서트가 악천후 속에서 어렵사리 이루어졌기에 저에게 더욱 더 기억에 남는 듯합니다. 이 데뷔 무대 후 핀커스 주커만 등 쟁쟁한 뮤지션들과 함께 상당히 많은 투어 콘서트를 했었습니다. 유럽 무대에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도전하여 진출하고 싶었지만 소련(현 러시아)에서 개최되는 콩쿠르라 정치적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결국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요."
 
정명화 Photo by 박성희   정명화 Photo by 박성희
 
솔리스트로서의 삶, 교육자로서의 삶에서
 
정명화 Photo by 박성희   솔리스트로서의 정명화만큼이나 교육자 정명화의 커리어 역시 우리에게 깊이 각인된다. 그는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로 부임, 수많은 한국의 재능 있는 후학들을 양성했다. 탄탄한 음악 인프라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그의 국내 리턴은 한국음악계 발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시 정명화는 미국에서 매네스 음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남편(구삼열 現 서울관광마케팅 대표이사)이 유니세프 대표로 일본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국에 올 기회가 많았어요. 처음에는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에 머물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의 문화적 환경이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한국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음식을 언제든 먹을 수 있었고, 훌륭한 세계적 뮤지션들의 공연도 미국이나 유럽 못지않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인터내셔널 활동을 위해 떠나 있을 이유가 없었어요. 또한 무엇보다도 한국의 학생들이 세계 어느 학생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재능을 가졌기에 가르치는 기쁨이 컸습니다."
지난 2009년 8월 정명화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정년퇴임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초빙교수로 학생들과 함께했고, 올해는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이와 맞물려 그는 한국 최대 규모의 뮤직 페스티벌인 대관령국제음악제의 예술감독으로 동생 정명화와 함께 추대되었다. 정명화는 지금까지 유엔마약퇴치기구 및 한국 유니세프 친선대사 등 의미 있는 사회활동을 펼치며 훌륭한 예술가로서의 본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남편이 AP통신 로마 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이탈리아에서 함께 머물렀던 덕분에 유럽에서 음악활동을 하며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어요. 이번 일도 그래요. 학교 영재 아카데미에 있는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좀 더 가르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초빙교수·명예교수 직을 주어 조금 더 함께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 그 타이밍에 대관령국제음악제와 같은 훌륭한 뮤직 페스티벌을 맡게 되었습니다. 정교수직을 유지하며 풀타임으로 학교에 머물렀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었죠. 모든 일들이 이렇게 적절한 타이밍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저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인 것 같아요. 아티스트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공인입니다. 과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에 그것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은 저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밝고 따뜻한 하이든을 들려줄 터
 
정명화 Photo by 박성희
 
북한산 산자락에 자리한 정명화와의 자택은 복층 빌라였다. 비록 포맷된 공간이지만, 어느 물건 하나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같은 심플함과 모던함이, 그러면서도 차갑지 않은 푸근함이 느껴졌다. 호젓이 첼로와 함께 하는 그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정명화의 공간은 이야기 속의 그와 쏙 빼닮았다. 타이밍이라는 시간과 적재적소의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정명화를, 그리고 그의 첼로음악을 표상한다. 생각해보면 정명화의 순항은 어쩌면 공간을 자기화하듯, 시간을 공간화하는 공감각의 마술이지 싶다. 음악을 시간예술이라고 하지 않던가.
"글쎄, 첼로를 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공간을 활용하고 표현하는 직업을 갖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렸을 적부터 눈이 예민했거든요. 건축이나 어떤 공간을 보면 사이즈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어떤 음악이 템포 안에서 표현해야 하듯이요."
오는 5월 14일에 정명화가 무대에 설 아람누리 심포닉 시리즈는 고전주의의 대표적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하이든을 조명하는 기획으로, 정명화가 연주할 공연에서는 하이든이 주제이다. 정치용이 이끄는 KBS교향악단이 정명화와 함께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C장조를 협연하며, 교향곡 제83번 「암탉」, 104번 「런던」을 들려준다. 정명화에게는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으로의 첫 나들이이다. 전통의 KBS교향악단과 정명화는 그간 적지 않게 호흡을 함께 해왔고, 또 지휘자 정치용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동료로서 음악적 호흡을 함께 해온 바 있어 이들의 조우가 기대된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라는 테마를 보며 잠시 이들의 음악을 생각해본다. 두 작곡가 공히 고전주의의 대표적 작곡가이고, 음악적 분위기 역시 밝음으로 대표되는 작곡가이다. 하지만 그 밝음의 이면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모차르트는 이미 채색된 밑그림에 밝음을 덧칠한 배색이라면, 하이든의 밝음은 흰 도화지 위에 밝음을 채색했다. 특히, 첼로 협주곡 C장조에는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의 기쁨과 만족감이 C장조의 생기와 함께 철철 넘쳐흐른다.
"하이든의 협주곡은 C장조와 D장조가 있는데, C장조 협주곡은 작곡된 지 거의 200년 만인 1961년에 악보가 발견되었어요. 그래서 당시 C장조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저 역시 1960년대 중후반부터 신나서 연주하기 시작했고, 70~80년대에도 C장조 협주곡을 많이 했었어요. 젊어서 했던 것은 몸에 익숙하게 배어 있기 때문에 쉽게 그 감각을 끄집어낼 수 있죠. 첼로의 C선은 개방현으로 상대적으로 D장조보다 오프닝이 화려하고 편하게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본 글은 고양문화재단 발행 월간 <누리> 2011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김재욱

    2013.07.17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