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천천히, 함께, 그리고 빛나는 순간들>
지난 8월 2일 토요일 두 시,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에서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천 개의 파랑>을 관람했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콜리’와 경주마 ‘투데이’,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을 통해 공존하는 삶의 가치를 보여 주고, 치유를 전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지 SF적 상상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일상의 면면을 담아냈다. 그 시간동안 나를 돌아보고 다독이기도 하면서 공연에 푹 빠졌다.
휴머노이드 C-27은 연구원의 실수로 학습용 칩을 얻게 되고, 그 덕에 천 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
콜리는 경주에 사용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C-27이었고,
연재를 만나기 전까지 이름이 없었다.
연재를 만나 이름을 갖게 된 콜리는 지치지도 않고 "콜리, 콜리, 콜리……" 하고 노래한다.
존재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투데이는 콜리와 호흡을 맞추는 경주마다.
경마장에서 빠른 달리기 실력으로 주목 받는 어린 말.
투데이는 언제나 빠르게 달렸지만 더 빠르게 달려야했고, 관절이 망가질 때까지 달리다가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단지 더 이상 빨리 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어느 순간 영리한 콜리는 깨닫는다. 투데이가 더 이상 달리면서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해요."
극 중 콜리가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숨 가쁘게 살아온 나의 시간을 반추해 보았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발버둥치듯 보내온 시간들.
그렇게 달려온 덕분에 목표와 가까워지긴 했지만, 때때로 공허하고 무기력했다.
이 작품은 내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이야기해 주었다.
콜리처럼 섬세하게, 더 천천히 살아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잃고 살아가는 삶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화재 현장에서 3%의 가능성으로 살아남은 보경은 300%의 책임감을 가지고, 두 딸과 살아간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 홀로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 생활의 무게, 멈춰버린 시간.
"내 시간은 멈춰 있어.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라는 보경의 대사에, 콜리는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나에게도 멈춘 시간들이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끄적이던 글, 누군가를 의심 없이 사랑하던 마음.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시간은 종종 나를 슬프게 한다.
콜리는 말한다.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콜리 덕분에 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나도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천천히라도.'
연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몸이 불편한 언니를 배려하는 게 당연한 소녀 연재.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조차 조심스러웠던 아이.
그런 연재가 폐기 직전의 휴머노이드 C-27을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살아난다.
전 재산을 털어 콜리를 사들이고, 이름을 붙여 주고, 튼튼한 두 다리를 만들어 준다.
콜리가 회복되어 가는 과정에서 연재는 눈부시게 빛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콜리는 말한다.
“행복해 하고 있어요. 투데이가 뛸 때처럼, 당신도요.”
나는 요즘 무엇을 하며 빛을 냈을까.
그리고 연재를 보며, 자연스럽게 내 동생을 떠올렸다.
다리가 불편한 나를 위해, 어쩌면 많은 것을 양보하고 배려해 왔을 나의 동생.
표현은 서툴지만 속이 따뜻한 연재처럼, 동생 역시 내게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을 베풀었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먹먹해졌고, 눈물이 솟았다.
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를 타는 은헤에게 필요한 것은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의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
이라는 원작 속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잠시나마 휠체어를 타본 경험이 있는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달라고 손을 뻗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도와 주려고 했지만,
은혜와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어디든 혼자 힘으로 갈 수 있는 환경이다.
은혜 역할을 한 강혜연 배우가 진심을 다해 노래할 때 몇 번이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천 개의 파랑>의 중심 키워드는 ‘공존’이 아닐까.
장애와 비장애, 인간과 기계, 부모와 자녀, 생명과 생명.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가야 한다. 반드시!
극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공존은 ‘느리게 살아도 괜찮다’는 위로이기도 하며,
‘당신의 삶이 충분히 의미 있다’는 응원이기도 하다.
이 공연은 내게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며 빛나고 있는가?
당신의 시간은 흐르고 있는가, 멈춰 있는가?
당신은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머리가 복잡해지고 지난 날을 조금 후회하려는 찰나,
<천 개의 파랑>은 그 마음마저 읽은 듯 섬세한 연기와 아름다운 노래로 내게 말해 주었다.
“지금도 괜찮아. 아주 천천히, 너만의 속도로 살아 가도 돼."
이 세상의 많은 은혜들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그런 날을 꿈꾸어 본다.
당신의 오늘(Today)은 어떠냐고 묻는 극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리며
천천히, 오늘 하루 치의 행복을 쌓아 본다.
PS. 이렇게 따뜻한 세계를 그려 주신 천선란 작가님,
울림이 있는 공연을 완성해 주신 서울예술단의 배우님들,
멋진 공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신 고양문화재단에 감사드립니다.
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