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인상파화가라면 늘 그리는 장르이다. 클로드 모네가 그린 물과 양귀비의 풍경은 인상주의의 회화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유트릴로의 도시 풍경들, 르노와르의 유원지 선상파티의 유쾌함, 드가의 현기증 나는 밤의 풍경들. 인상주의 화가들의 만화경 같은 풍경화는 산업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융성하였던 19세기 제2제정기 파리의 근사한 모더니티의 ‘인상’이었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18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인상파 화가들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피사로는 1874년 사진가 나다르의 화실에서 개최된 첫 번째 인상파전에서 1886년 마지막 여덟 번째 그룹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던 유일한 화가였다. 피사로는 까다로운 드가와 오래 교유하였고 괴팍하고 억눌렸던 세잔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섬세한 여성화가 모리조와 개성이 강한 고갱에게도 스승처럼 조언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랍비를 연상시키는 풍성한 수염과 온화한 눈빛을 지닌 이 이방인 화가 피사로의 풍경은 현대적 세련미가 풍기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Camille Pissarro_Sunset at Eragny sur Epte,Autumn
피사로의 풍경은 1860년대부터 1880년대 퐁투와즈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파리로부터 기차로 2 시간가량 떨어진 와즈강변의 퐁투와즈는 도시화로 확장되었던 파리근교와는 다른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퐁투와즈는 중세적인 프랑스 농촌사회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었던 시골이었다. 구릉으로 이어진 마을은 간소하면서도 기하학적인 형태의 집들이 모여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낮은 평원과 구릉에서 밀과 과수를 경작하였다.
피사로는 이곳 와즈강변과 마을의 풍경을 일상적이면서도 친근한 시선으로 화폭에 담아냈다. 그의 그림에는 계절의 절기의 변화와 농부의 노동, 마을의 작은 일상들이 담겨져 있다. 겨울 첫 서리가 내리면 농부의 마음은 바빠지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겨우살이 땔감을 메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농부의 무거운 마음은 높은 지평선과 아득해 보이는 과수원의 능선으로 인해 더욱 애잔하다.
Camille Pissarro_Farm at Montfoucault ,Snow Effect
피사로의 풍경은 피사로의 정체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그림은 사람이다. 피사로는 멀리 카리브해에서 이주해온 이방인이었다. 덴마크령 성 토마스 섬에서 잡화상을 하던 가족의 소부르조아 삶에서 도망치듯 파리로 온 피사로는 번창하는 자본주의 환등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박한 농촌적 유대의식을 기반으로 한 아나키즘은 평생 피사로가 간직한 철학이었다.
피사로의 풍경에는 그 안에 사람 사는 이야기가 오밀 조밀하게 펼쳐져있다. 한여름 마을 어귀의 길에서 만난 두 여인은 금새 이야기에 빠져든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수다가 끝나길 기다리며 아예 잔디밭에 앉아 무료를 달래고 있다. 양산을 받쳐 든 부유해 보이는 여인이나 농사짓는 아낙 사이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도 없고 거만함과 비굴함도 없다. 피사로가 꿈꾸었던 공동체의 평화란 이런 것이었을지 모른다. 햇볕은 너무 뜨겁지 않고 마을의 가옥은 선명한 콘트라스를 이루며 화면에 안정감을 더한다. 모네의 카푸신 거리에서 한 점의 얼룩으로 그려진, 파편화된 도시의 군상들과 다른 한가로운 농촌의 한나절, 이것이 피사로 풍경화의 독특함이다.
Camille Pissarro_View from my Window, Eragny sur Epte
19세기말 전 지구를 분할하였던 세국주의 시대, 식민지의 한 변경 출신인 피사로의 작품에 이국적 풍경 대신 농가의 전원이 대신하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피사로에게 조언을 구했던 폴 고갱의 꿈틀거리는 열대로의 지향이 그의 어린 시절 브라질 상선에서의 체험 때문이었다고 당연하게 믿어진다면 말이다.
피사로의 풍경화에는 모네의 소시민적인 만족감이나 르노와르의 고답적 전통과는 다른 솔직함과 소박한 정서가 흐른다. 피사로의 풍경은 ‘인상’이 아니라 사실이었으며, 관광이 아닌 현실의 공간이었다. 그의 깊고 따뜻한 성정은 부드러운 빛과 바람이 통하는 길에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시간을 훌쩍 넘어 우리에게 청량한 빛줄기를 선사한다.
김미정 (미술사가, 홍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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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The Ashmolean Museum, University of Oxford
[출처] 피사로의 전원|작성자 고양아람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