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케루비니(Luigi Cherubini, 1760~1842)는 26세부터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20년 이상 파리음악원의 작곡과 교수와 원장으로 있으면서 프랑스 음악계의 큰 지도자였다. 특히 그의 오페라는 베를리오즈와 베토벤의 오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케루비니의 오페라 <메데아 Medea>는 초연(1797.3.23, 파리 페이도극장) 당시 <메데 Médée>로 표기됐던 프랑스어 버전이었고, 오페라 코믹(Opera Comique, 이야기 대사와 노래가 어우러지는 프랑스 오페라)의 형태였다. 그런데 1855년 프랑크푸르트 공연 이래 레치타티보(Recitativo서창; 대사와 아리아의 중간 창법인 노래하는 이야기)가 딸린 이탈리아어 버전이 통용되었다.
천재 케루비니는 고전파와 낭만파의 교량 역할에서 더욱 빛이 났는데, 후세대 벨리니(Bellini), 도니제티(Donizetti) 등의 도래에 대한 예고였다. 특히 벨리니의 걸작 오페라 <노르마 Norma>는 <메데아>의 소재를 발전시킨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작품은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와 각별한 인연이 있고,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배역(메데아, 노르마)이었다.
19세기 이후 오페라 무대에서 사라졌던 <메데아>를 1950년대에 부활시킨 사람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io Serafin)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인 세라핀은 벨칸토 전문가로서 가수 개인의 특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지도력이 남달랐다. 칼라스는 메데아 역을 위해서 30kg의 체중감량을 시도할 만큼 치열한 애정을 보였다. 위대한 걸작이 홀연히 소멸하고 또 부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려운 배역을 소화할 명가수와 가수의 재능을 식별하고 지도할 명지휘자의 존재 여부가 바로 그 운명의 힘인 것이다.
원시 욕망의 원형질인 신화의 세계에는 러브 스토리 역시 유별나다. 여주인공 메데아는 변절한 남편(지아조네)에 대한 복수로 그의 새 약혼녀와 장인을 독살하고 어린 두 아들까지 살해하는 참변을 저지른다. 그렇다면 이 잔혹극의 음악은 격정의 소용돌이일까? 그러나… 아니다! 질투의 화신 메데아를 동정하듯 선율은 시종 애잔하게 흐른다. 제2막에서 심복인 네리스가 메데아를 위로하는 아리아(Solo un pianto con te versare)와 제3막에서 메데아가 어린 자식을 차마 죽이지 못해 통탄하는 아리아(Del fiero duol)를 듣노라면 ‘오죽하면……어쩌면……’ 하고 자꾸 탄식이 쏟아진다. 이 얼마나 소름 돋는 감동인가!
추천 CD는 전술한 명콤비의 결정(結晶)인 세라핀 판(1957년, EMI)을 첫손으로 꼽고 싶다. 여주인공 메데아 역은 전성기의 마리아 칼라스(34세)가, 연적 글라우체 역은 유망주의 레나타 스코토(Renata Scotto, 23세)가 각각 맡았으니 머지않아 또 한 시대의 획이 그어질 법하다. 그러나 이 음반은 현재 절판이 되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다행히 이 음원이 내장된(70CD 중 46, 47번 CD) [마리아 칼라스 스튜디오 레코딩 전집, 70CD, ￦214,500/사진1]이 있는데, 가격이 좀 부담스럽다. 하지만 또 다행은 이 전집이 순 알짜의 모음인 것이다. 가히 명반의 대향연이라 자랑할 만하다. 오페라 전곡 22작품(Bellini의 Norma, Donizetti의 Lucia, Ponchielli의 La Gioconda, Puccini의 Tosca 등은 다른 배역진과 지휘자로 중복)의 명반이 55장, 아리아 모음과 리사이틀 실황 음반이 14장, 대본과 칼라스 사진 모음이 1장 등으로 총 70CD인데 정말 살아있는 오페라사(史)요, 벨칸토의 중추신경이다.
또 하나의 추천 CD는 파리 초연 프랑스어 버전을 최초로 복원한 <메데 Médée>(Patrick Fournillier판, 1995년, Nuova Era, 2CD, ￦26,600/사진2)인데 마르티나 프랑카의 발레 디트리아 페스티벌 실황 레코딩이다. Cherubini의 절제 미학을 곰곰이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